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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둘의 아빠가 타고 쓴 혼다 파일럿 시승기

조상이 큰돈을 남겨 주거나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이름으로 차를 여럿 두긴 어렵다. 그래서 선택의 고민이 생기기 마련. 대한민국의 보통사람인 필자도 국산 중형차를 타는 입장에서 아이가 둘로 늘어나니 고민에 빠졌다. 세단의 경우 대부분 5인승. 하지만 실제론 4인승이다. 뒷좌석 가운데를 제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여행을 떠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엄마, 아빠, 아이 둘만 태우면 세단으로도 충분하다. 트렁크엔 주말 동안 먹고 잘 짐을 충분히 실을 수 있다. 한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동반하는 경우 고민스럽다. 누군가는 아이를 안고 탈수 밖에 없는 노릇. 가끔이고,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지만, 아이를 에어백 대용으로 쓰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상황이 이쯤 되면 7인승 SUV나 8~9인승 미니밴을 기웃거리게 된다. 고민이 시작되면서 국산 7인승 SUV를 두루 찾아 나섰지만 쇼룸엔 죄다 5인승만 전시되어 있다. 이유를 물으니 영업사원의 입에서 대번에 ‘3열은 임시용이에요’라는 답이 나왔다. 억지로 3열을 선택할 경우 2열 좌석의 형태까지 조금 불편하게 바뀐다는 소리를 들으니 맘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시선은 자연스레 수입차로 쏠렸다. 주머니 사정과 실용성을 고려해 리스트에 놓은 것이 포드 익스플로러와 혼다 파일럿. 결국, 두 차종을 차례로 경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시승은 2부작 중 1부의 성격에 가깝다.

외모 가꾼 올라운드 플레이어

혼다 파일럿은 신형이 되면서 몰라보게 외모를 가꿨다. 변신템을 쓴 그녀(혹은 그 남)보다 변화의 보폭이 훨씬 크다. 고백하건대, 이전 모델은 터프하기만 했지 디자인의 ‘디’ 자를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못생겼었다. 큰 덩치에 뛰어난 실용성에 ‘혹’ 하다가도 못생긴 얼굴에 구매를 포기한 경우가 내 주변에만도 몇이나 됐다.

그러나 신형은 상황이 아주 다르다. 이발소만 고집하던 아재가 댄디룩으로 변신한 느낌이다. 라디에이터 그릴의 큼지막한 크롬 라인이 살짝 부담스럽지만 예전처럼 투박한 느낌은 아니다. 범퍼와 보닛에 굵은 캐릭터 라인을 심어 제법 스포티한 분위기까지 냈다.

변화는 옆에서도 또렷하다. 구형보다 길이를 80mm 당기면서 65mm 눌렀다. 미니밴 느낌이 나기도 하는데 뒤로 갈수록 살짝 올린 캐릭터 라인과 루프랙으로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동급 최고 수준인 20인치의 커다란 휠도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뒤쪽은 큰 키가 주는 시각적인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가로 방향의 캐릭터를 강조했다. 프런트의 주간주행등처럼 갈고리 모양의 LED로 포인트를 준 테일램프와 범퍼 아래에 길게 붙인 크롬 장식이 좋은 예다. 덕분에 보통의 SUV보다 넓고 안정적인 느낌이다.

동급에서 가장 넓고 실용적인 실내

파일럿의 실내에선 ‘어떻게 하면 공간을 허투루 쓰지 않을까?’라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기어 레버 오른쪽에 2개의 컵홀더가 있고 센터엔 1.5L 피티병 서너 개는 집어삼킬 커다란 콘솔이 자리를 틀었다. 그리고 2.5A짜리 4개의 USB 포트를 제공해 쓰임새를 높였다.

큰 몸집을 활용해 도어 안쪽의 수납함도 3단으로 널찍이 파냈다. 다분히 미국 취향이어서 유럽의 날렵한 세단을 기준으로 삼으면 투박해 보이겠지만 실용성만큼은 최고다. 작은 멋도 부렸다. 도어 포켓과 운전대, 프런트 컵홀더에 은은한 조명을 더 한 라이팅 패키지 이야기다.

왼쪽에 회전계, 오른쪽에 연료와 수온계를 두고 중앙에 속도계를 표시한 계기판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감성이 교차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꼭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보여준다.

스티어링 휠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스위치들이 보기 좋게 붙었다. 그중에서도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인 LKAS(Lane Keeping Assist System)와 능동형 크루즈 컨트롤 시스템인 ACC가 눈에 띈다.

센터페시아엔 8인치 디스플레이가 자리를 틀었다. 포드 익스플로러의 경우 한글화가 완벽하지 않아 불만인데 파일럿의 8인치 디스플레이는 완벽하게 한글화되었다. 조작 편의성을 위해 살짝 앞으로 튀어나오도록 디자인한 점도 반갑다. 작지만 배려가 느껴지는 조치다. 오디오와 내비게이션 조작은 터치 형태로 이뤄지고 공조 스위치는 모니터 아래에 별도로 뺐다.

7인승 SUV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공간. 파일럿의 경우 탑승 공간이 4,296L에 달하고 1열 뒤/ 2열 뒤/ 3월 뒤의 공간은 각각 2,376L/ 1,325L/ 467L이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포드 익스플로러는 탑승 공간이 4,292L이고 2,313L/ 1,243L/ 594L.

2~3열 공간의 쓰임새는 파일럿이 우세하고 3열까지 모두 세웠을 때의 트렁크는 익스플로러가 낫다. 숫자로도, 실제로 확인해봐도 그렇다. 짐 공간이야 루프박스를 달아 해결할 수 있기에 파일럿의 패키징이 7인승 SUV 구매를 고민하는 고객에게 조금 더 매력적이다.

3열로 들어가기도 쉽다. 2열에 달린 끈이나 레버를 힘껏 당겨야 슬라이딩 되거나 접히는 대부분의 7인승 SUV와 달리 파일럿은 2열 옆구리와 등받이 위의 동그란 버튼(2열 워크 인 스위치)을 살짝 누르기만 하면 슬라이딩 되며 접힌다. 이를 통해 아이와 여성도 쉽게 3열에 오를 수 있다. 3열의 공간은 3인승이지만 어른 둘이 타기 알맞다. 2열만큼은 아니지만 레그룸과 헤드룸 모두 넉넉해 쓰임새가 좋다. 게다가 유아 시트 고정을 위한 아이소픽스(ISOFIX)까지 갖춰 든든하다. 3열에 이 기능이 있는 SUV는 흔치 않다.

트렁크 바닥을 2가지로 변형해 쓸 수 있는 점도 매력이다. 3열을 접었을 때 평평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고 그 아래에 다양한 물건을 안전하고 깔끔하게 수납할 수 있다. 반면, 3열을 세울 때는 트렁크 바닥을 들어내 더 깊은 공간을 만들어 키가 큰 물건을 실을 수 있다. 혼다는 이를 ‘톨 카고 모드’라 부른다.

정숙한 파워트레인

파일럿의 파워트레인은 V6 3.5L 가솔린과 6단 자동변속기로 구성되었다. 디젤 엔진 위주인 국내 SUV 시장을 생각할 때 약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행인 건, 최근 이런 기세가 옅어지고 있다. 가솔린 엔진의 연비가 예전보다 나아졌고 정숙성에선 아무래도 디젤보다는 가솔린 엔진이 한 수 위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산 SUV들의 가솔린 라인업이 늘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파일럿은 직접 분사방식과 가변 실린더 제어 기술로 효율을 높여 가솔린 엔진의 약점을 보완했고 장점을 극대화했다. 최고출력이 257마력에서 284마력으로 올랐고, 최대토크는 36.2kgm까지 낸다. 강력한 라이벌인 포드 익스플로러 3.5L(294마력, 35.3kgm)보다 출력은 약하지만 토크는 더 세다. 주행 중 기록한 평균연비는 8.2km/L. 도심과 서울외곽순환도로를 두루 달린 결과치곤 나쁘지 않다.

국내 기준으로 대배기량에 속하기에 출력과 토크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가속도 매끄럽고 무엇보다 회전 질감도 좋다. 큰 덩치임에도 움직임이 부드럽다고 느끼는 이유다.

변속기는 6단 자동이다. 미국의 경우 9단 자동변속기 사양도 있는데 동작이 세련되지 않다는 불만이 있으니까 마냥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다행히 6단 기어의 움직임은 농익을 대로 농익었다.

지구력 좋은 엔진과 노련한 변속기가 맞물려 뽑아낸 움직임은 SUV 평균치를 웃돈다. 몸집이 커 둔할 것이라는 편견은 괜한 걱정이다. 가속에 대한 피드백이 분명하고 크루징에선 범선을 타는 느낌이다. 시종일관 부드럽고 편안하다.

핸들링 감각도 만족스럽다. 큰 키를 무시할 순 없지만 제법 급한 코너에서도 운전자의 의도를 잘 따른다. 때문에 반복되는 굽잇길이 부담스럽지 않다. 많은 SUV가 코너를 만날 때마다 허둥대며 속도를 줄여야 하는 것과 대비된다. 지능형 전자식 구동형 배분 시스템과 토크 벡터링이 잘 빚은 서스펜션을 만나 이뤄낸 성과다.

제동력은 무난하다. 시속 100km를 달리다 급제동을 걸면 앞머리를 살짝 낮추며 멈춘다. SUV의 특성이다. 세단을 몰던 운전자라면 이질감이 들겠지만, SUV에 익숙한 터라면 불평하지 않을 수준. 제동거리는 SUV 평균보다 짧다.

차선이탈경보 시스템의 동작은 덩치만큼이나 투박하다. 세단의 경우 핸드폰 진동처럼 잘게 쪼개 운전자에게 알리는 타입인데 파일럿은 진동의 폭이 크고 깊다. 대형 SUV적인 취향이다.

안전, 그리고 넉넉한 장비

안전은 패밀리카를 고를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준. 파일럿은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 (IIHS: Insurance Institute for Highway Safety)의 자동차 안전성 평가에서 전 부문 최고 안전 등급을 획득하며 ‘탑 세이프티 픽 플러스(Top Safety Pick+, TSP+)’ 모델에 선정되어 이 기준을 가뿐히 만족한다.

장비도 충실하다. 40~140km/h 사이에서 작동하는 자동감응식 정속 주행 장치(ACC), 70~140km/h에서 차선 유지를 보조해주는 LKAS, 추돌 경감 제동 시스템 (CMBS), 차선 이탈 경감시스템 (RDM) 등 안전을 위한 장비들이 있고 편의 장비 중에선 원격 시동이 가능한 리모트 엔진 스타터가 유용하다. 겨울이나 여름, 가족 여행을 앞두고 미리 차고로 가 시동을 걸어 온도를 맞춰야 하는 불편함이 없다.

약 60m 범위에 파일럿이 있다면 방안에서 미리 시동을 걸어 따끈하게 데우거나 시원하게 온도를 맞출 수 있다. 도어는 잠겨 있고 10분이 지나도 운전자가 차에 타지 않으면 시동이 꺼지기 때문에 도난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사? 말아?

혼다 파일럿은 아이 둘 있고 가끔 부모님 모시고 나들이 가는 가정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지다. 디젤 엔진을 단 국산 7인승 SUV보다 기름값이 더 들긴 하지만 공간이 훨씬 넓고 정숙성이 뛰어나다. 게다가 큰 덩치를 무색게 할 정도로 몸놀림도 직관적이다. 무엇보다 미니밴처럼 짐차 느낌이 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든다. 5,460만 원의 값은 국산 대형 SUV 최고급형보다는 위이고 포드 익스플로러(5,540만 원)보다는 살짝 아래에 있다. 이틀간의 동행을 통해 맘의 절반을 내어 줄 만큼 만족도가 높다고 인정한 나. 아내는 벌써 캠핑장에 선 파일럿을 그린다.

전문가 평가

84.3
  • 85 파워트레인
  • 80 섀시 & 조종성
  • 80 승차감
  • 90 안전성
  • 85 최신 기술
  • 80 가격 & 실용성
  • 90 기타
박영문

박영문 기자

spyms@encarmagazine.com

부품의 기술적인 결합체가 아닌, 자동차가 지닌 가치의 본질을 탐미하는 감성 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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