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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 86 오너가 벨로스터 N을 몰래 타 본 소감

필자는 <이니셜 D> ‘덕후’입니다. 퍼스트 스테이지부터 파이널 스테이지까지 세 번이나 돌려 보았습니다. 사무실 자리와 집도 이니셜 D 테마로 꾸몄습니다. 실제 자동차도 토요타 86을 갖고 있습니다. 덕분에 출근할 때는 이니셜 D 주인공인 탁미가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탁미처럼 제 취미도 드라이브. 밤 10시 정도가 되면 제 86의 시동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서울 전역을 누빕니다. 내부순환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이브 코스입니다. 와인딩 로드도 가끔씩 가지만 현실적으로는 내부순환로나 강변북로 드라이브가 재미있습니다.

탁미를 꿈꾸지만 현실은 이쯔기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회사에서 벨로스터 N을 샀습니다. 제 뒷자리 선배로부터 "머저리 경영지원팀"과 "골탕 먹여"라는 소리가 들리고 두 달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여담이지만 그 선배는 며칠 전에 '경영지원팀 까는 시승기'를 썼다가 사장님과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는 후문입니다. 식사 이후 며칠 동안은 자리에 보이질 않네요. 퇴사한 건가.

벨로스터 N은 신선했습니다. 얌전함의 상징인 현대 마크 붙었는데 머플러에서는 펑펑 팝콘 소리 나는 게 묘하죠. 이니셜 D 덕후가 으레 그렇듯이 저 역시 전륜구동(FF)은 차로 여기지 않지만 이번은 달랐습니다. 타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편집부 막내이기 때문에 시승 차례가 오려면 한참 남아 보였습니다. 결국 회사 몰래 끌고 나가기로 결정! 이 글이 발행된다면 모두 알게 되겠죠? 편집장과 사장님, 그리고 경영지원팀에게 미리 죄송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너무 타보고 싶었는데 어쩌겠어요.

’86 오너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N’

몰래 갖고와서 나의 86과 한 컷

첫인상 영역: ★★☆☆☆
첫인상은 그냥 그랬습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일까요? 예전에 시승했던 벨로스터 노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시트 포지션도 어색합니다. 최대한 내려도 떠 있는 느낌을 줍니다. 달리라고 나온 차에 팬(FAN) 달린 전동 시트라니. 순수 스포츠카가 아니라 ‘고성능 벨로스터’라는 한계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태생부터 스포츠카로 만들어진 86과 대조되는 포인트입니다.

어쩐지 버킷시트 많이들 달더라

존재감만큼은 끝내줍니다. 시동 걸면 ‘크르릉’ 소리가 제법 크게 납니다. 86은 사실 상 배기음이 전무한데 벨로스터 N은 다릅니다. 지하주차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죠. 얼른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드라이브 모드를 바꾸면 공회전일지라도 음색이 적잖이 달라집니다. 가령 스포츠 모드에서는 한층 굵직한 소리가 납니다. 에코 모드가 제일 조용하고요. 지하주차장 빠져나올 땐 에코 모드로 설정했습니다. 회사에서 야근하는 분들께 들키면 안 되니까.

에코 모드는 나름 치밀한 작전이었습니다

달리기 영역: ★★★★★
86 오너는 오늘도 웁니다. 아반떼 스포츠보다 느리다며 허구한 날 까이는데 그보다 더 빠른 녀석이 나왔으니까요. 직접 재어본 제로백은 6초 초반. 선배가 벨로스터 N을, 저는 86을 타고 같이 출발했는데 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2.0L 엔진에 터보까지 달았으니 비교될 리 없습니다. 86은 터보가 없어서 슬픕니다.

겨우 따라왔더니 신호가 바뀌었습니다

더욱 부러운 건 고속에서도 지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필자가 86 이전에 소유했던 아반떼 스포츠는 180km/h부터 속도계가 더디게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벨로스터 N은 200km/h에서부터 더뎌지는 느낌입니다. 최고속도는 250km/h에서 ‘제한’된다고 하니 더 부럽습니다. 참고로 86은 200km/h를 넘어서면 엔진이 나 죽어~합니다.

사실 7,400rpm까지 안 씁니다. 제 86은 소중이니까요

고갯길 영역: ★★★★☆
‘전륜 구동(FF)이 빨라 봤자’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코너에서 벨로스터 N은 다릅니다. 일단 피제로 타이어가 끈적하게 노면을 붙듭니다. 이때 일어나는 롤은 전자 제어 서스펜션이 막아내고요. 브레이크는 쉽게 지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자식 LSD(eLSD)의 역할이 상당합니다. 브레이크 적당히 잡고 코너에 던진 다음, 엑셀러레이터를 힘차게 밟아도 코너 안쪽을 바라봅니다. 뒷바퀴가 살살 미끄러지는 게 꼭 후륜구동(FR) 같습니다.

고갯길 여포 등판

생각보다 빠르게 잘 달립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 입니다. 앞서 지적했던 시트는 여전히 높게 느껴집니다. 무게 중심이 높아 불안감이 옵니다. 힐앤토 할 때는 정강이가 닿습니다. 클러치 감각도 지적할 부분. 클러치 스트로크 자체는 긴데 동력이 바퀴로 전달되는 시점(미트 시점)은 낮습니다. 발이 허우적거리죠. 혹자는 벨로스터 N을 두고 ‘고갯길 여포’라던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거 싸움’만’ 잘 한다는 얘기 맞죠?

페달이 영 별로입니다

감성 영역: ★★☆☆☆
벨로스터 N에게는 없는 게 있습니다. ‘감성’이죠. 자동 레브 매칭, 정말 편합니다. 고갯길에서 힐앤토하느라 바삐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브레이크-클러치-변속-가속하면 끝. 그러나 타면 탈수록 재미가 없습니다. 필자는 M/T의 장점을 ‘기계와의 교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벨로스터 N은 컴퓨터가 다 알아서 해주는 느낌입니다. 거부감 들더군요. 오토 레브 매칭을 끌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신의 한수는 오토 레브 매칭이 아닙니다. 이걸 끌 수 있는 거죠

팝콘 터지는 배기음. 처음에는 신선했습니다. 생소하잖아요. 1단에서 2단 넣을 때 얕게 ‘그르렁’ 거리는 게 듣기 좋았습니다. 3단으로 내달리다가 4단 넣으면 총소리도 납니다.

하지만 종일 듣다 보면 별로입니다. 이건 저뿐만 아니라 M2를 타는 선배 기자도 똑같은 의견을 냈습니다. 그는 "잠깐 탈 땐 재밌었는데 듣다 보니 시끄럽기만 해서 스포츠 배기를 끄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음색인 것 같습니다. AMG나 M처럼 묵직한 소리가 아닌 ‘날티’나는 소리가 납니다. 전형적인 4기통 사운드라 영 특색 없습니다.

팝콘 터지는 게 신기합니다. 처음 1시간 동안은요.

종합 점수: ★★★★☆
벨로스터 N을 몰래 타보니 이니셜 D에 등장하는 ‘시빅 타입 R(EK9)’이 떠오릅니다. 극중 레이서인 토모유키가 탁미를 이길 뻔한 이야기. 시빅에 260마력짜리 엔진을 얹고 하치로쿠를 추월한 바로 그 차가 떠오릅니다. 벨로스터 N은 전륜 구동(FF)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줍니다. 잘 달리고, 잘 멈추고, 잘 돌아 나갑니다. 현대에서 이런 차를 만들어 낸 것만으로도 박수를 보냅니다.

다음 출시될 N 모델은 더욱 N 답기를 바랍니다. ‘고성능 뱃지’는 단순히 운동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무언가가 있어야합니다. 86이 그렇습니다. 객관적으로 빠른 차는 아닙니다. 하지만 귀로 들리는 박서 엔진 소리.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노면이 묘한 떨림을 줍니다. 그저 ‘잘 달리는 차’가 아닌 ‘설렘이 있는 차’이길 바란다는 얘기입니다.

"86 팔고 벨 N 사버려?"

다음에는 벨로스터 N을 타고 인제 스피디움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몰래 가볼까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허락 받고 다녀오겠습니다. 밤에 타고 나가니까 기름도 사비로 채워야 하고 주차장 돌아와서 같은 자리에 세워야 하고… 여간 불편한 게 아니더군요. 트랙에서 86과 벨로스터 N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비교해 보겠습니다. 과연 느려 터진 86이 트랙에서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