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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감성의 여유, 혼다 파일럿 블랙에디션 시승기

혼다 파일럿 3.6 가솔린 블랙에디션을 장기간 시승했다. 혼다의 준대형 SUV '파일럿'은 대한민국 시장에서도 비교적 오랜기간 시판되어온 모델이다. 예로부터 한국 자동차 시장의 정서는 북미와의 유사점이 많았다. 크기와 배기량을 중시 여기고, 안전성 보다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세팅 등 '여유'를 강조하는 양산 차량들이 인기를 끌어왔던 것이다. 지금은 그 문화도 점차 다각화 되어가고 있지만, 내수 자동차 시장에서 준대형 SUV가 보편화되는 확실한 여건을 마련했음에는 이견이 없다.

혼다는 전통적으로 기술 투자에 많은 비용과 인력을 아끼지 않던 기업이다. 특히 승용차 산업의 기술 혁신을 이끄는 모터스포츠와 일가견이 있는 브랜드다. 그 반면, 역사적으로 승용차와는 거리감이 있던 SUV에 대한 라인업은 단조로운 편이었다. 그리고 혼다는 미국 자동차 시장과의 밀접성이 높다. 앞장서 북미 현지 생산을 시작했으며 배기가스 규제 '머스키법'을 가장 먼저 충족할 정도, 그러나 북미 시장은 SUV에 대한 선호도가 정말 높다는 점이 역설이다. 파일럿은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개발된 SUV로, 실제 일본 내수 시장에서는 판매되지 않는다.

혼다 파일럿은 철저히 승용차 제조 기술에 의해 개발된 SUV라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말해 비포장 도로를 주파한다거나, 강력한 기동성을 자랑하는 정통 SUV 시장의 수요를 목표로하지 않았다. SUV의 실용성과 안전성, 내지는 '여유로움'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패밀리카'의 목적성이 가장 뚜렷하다. 때문에 섀시나 편의장비, 그리고 공간 활용성 등등 승용차의 이점을 중심으로, SUV시장의 많은 잠재 수요를 유치해 온 바 있다. 겉보기에는 SUV의 고유한 듬직함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패밀리 SUV에 대한 대중들의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해 특화된 선택지라는 의미다.

시승 차량은 혼다 파일럿 블랙에디션 트림이다. 기존 파일럿의 최상위 트림 '엘리트'에 전용 익스테리어 패키지와 실내 디자인 보강이 이뤄진다. 최근 혼다는 간결하면서도 직선 위주의 스타일링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파일럿도 같다. 사다리꼴 형태의 LED 헤드램프 디자인, 그리고 육각형의 라디에이터 그릴이 대담하면서도 안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징이라면 라디에이터 그릴의 프레임이 없이, 헤드램프와 하나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덕분에 간결한 디자인 구성에서도 세련되고도 개성적인 첫인상을 느껴볼 수 있다.

아울러 블랙에디션 트림의 차별화로 더욱 특별한 외관을 지니게 된다. 라디에이터 그릴과 헤드램프를 가로지르는 검은 색상의 그릴 바, 그리고 블랙 엠블럼과 범퍼 가니시 등등 멀리서도 느껴지는 존재감이 상당하다. 측면 디자인도 특별한 기교보다는 간결함을 남겼다. 혼다 파일럿의 전장은 약 5m 9cm인데, 워낙 전폭이 넓다 보니 상대적으로 짧아 보이는 경향은 있다. 특히 앞뒤 펜더의 볼륨이 과장되어 있기에 사진보다는 실물로 보는 덩치 압도적이다. 깔끔한 바디패널 형상과 함께, 두터운 C필러가 SUV 특유의 견고함을 잘 나타낸다.

블랙 에디션은 휠 디자인 역시도 차별화된다. 전용 20인치 블랙 알로이 휠이 적용된 모습, 차량 하부를 든든하게 보호하는 휠 아치 가니시와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후면부에서는 테일게이트 중심을 장식하는 검은색 몰딩이 시선을 이끈다. 전용 엠블럼과 커다란 테일램프를 자연스레 연결해 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과장되어 있는 리어 윈드 실드는 패밀리 SUV의 성격이 반영되며, 범퍼 하단부에는 사각형의 머플러 팁 형상이 자리 잡아 있다. 전체적으로 SUV 고유의 강인함이 느껴지는 간결한 외관이었다.

실내 공간이다. 역시 브랜드 고유의 직관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탁월한 시인성을 제공하는 매립형 10.2인치 디지털 클러스터, 그리고 플로팅 타입 9인치 스크린이 적용된다. HUD는 간단한 정보를 표기하고, 다이얼과 버튼을 적절히 활용한 센터페시아 역시도 사용감이 편리하다. 물리 버튼들의 피드백도 정교한 편이다. 변속기는 버튼 타입으로 센터 콘솔에 배치했는데, 각 변속단의 위치를 철저히 분리한 모습이다. 그 외 컵홀더와 무선 충전 패드, 대용량 콘솔 박스 등으로 실내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한국 정서에 맞는 편의 장비도 충분하다. 1열 전동시트와 운전석 메모리 시트, 통풍 및 열선 시트 등등 편안한 탑승감을 제공한다. 오디오는 BOSE 프리미엄 사운드가 표준으로 12 스피커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블랙 에디션 트림의 차별화는 인테리어 공간에도 계속되는 모습이다. 우선 1열 시트 헤드레스트에는 블랙 에디션 로고가 각인되어 있다. 전 좌석 시트에는 레드 액센트 스티칭이 더해졌고, 스티어링 휠도 동일하다. 천장에는 블랙 헤드라이닝이 묵직한 분위기를 더하며, 블랙 에디션에만 제공되는 레드 인테리어 라이팅이 화려함을 더해준다.

후석 공간이다. 우선 파일럿의 가장 큰 특징은 리어 시트 구조를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센터 시트 탈부착이 가능하기 때문에, 2열 벤치 시트나 독립 시트 중 원하는 대로 배치가 가능했다. 아울러 센터 시트는 트렁크 바닥 매트 아래 잔여 공간에 깔끔하게 수납할 수 있다. 준대형 SUV인 만큼 2열 공간 자체도 매우 여유롭다. 넓은 면적의 파노라마 선루프까지 기본 제공되고, 창문 하단 벨트라인도 낮게 배치되어 있어 탁월한 개방감을 제공한다. 측면 수동식 선셰이드가 제공되며, 2열 시트 열선과 독립 공조 기능이 포함된다.

2열 센터 시트는 폴딩 하는 경우 대용량 센터 콘솔이 되어준다. 수납공간과 컵홀더를 포함한다. 2열 시트 슬라이딩과 리클라이닝 역시 가능하다. 원터치 워크인 기능까지 적용되어 3열 시트는 편리하게 승하차할 수 있다. 3열도 3인이 탑승 가능하며, 공간 자체도 여유가 있는 편이다. 컵홀더와 에어벤트가 탑재되고, 각도는 6:4 비율로 분리되어 있다. 3열 시트를 펼쳐도 트렁크 잔여 용량이 확보되어 있으며, 좌측에는 파워 테일게이트 버튼이 편의성을 더해준다. 2,3열 시트를 폴딩 하는 경우 바닥면이 수평 형태로 마감되는 모습도 장점이다.

혼다 파일럿에는 배기량 3.5L급 V형 6실린더 i-VTEC 자연흡기 엔진이 적용된다. 최고 출력은 289HP, 최대 토크는 36.2Kg.m이다. 자동변속기는 10단으로 다단화를 거쳤으며, 공인 연비는 8.4Km/l로 인증을 받았다. 2130Kg의 공차중량과 상시 AWD 시스템을 감안하면 준수한 효율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원래 혼다의 VTEC 엔진은 가변식 캠을 활용한 극한의 효율성으로 인정받아왔다. 파일럿의 V6 엔진은 VCM, 다시 말해 가변식 실린더 관리 기능이 포함된다. 항속 주행 시 3개의 실린더만을 동작하여 연료 소비를 최소화하는 기술이다.

요즘 시대에는 흔치 않은 비교적 고배기량의 자연흡기 엔진이다. 그만큼 부드럽고도 정숙한 엔진 필링을 보여준다. 그 정숙성만큼은 깊은 인상이 남는 수준이다. 차량 방음처리보다도 엔진 자체의 완성도가 높다. 발진감도 가뿐하며, 일상 주행에서 답답함을 느껴볼 출력은 아닙니다. 최근에는 준대형 SUV들도 2.5L 미만의 라이트 사이징 엔진을 탑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고배기량 엔진 고유의 감성과 부드러움은 재현하기 어렵습니다. 수치상의 출력은 다소 낮아 보일 수 있더라도, 운전자가 체감하는 힘은 더욱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셈입니다.

10단 자동변속기는 부드러운 변속감을 제공해 준다. 1단은 사실상 오르막길을 위한 기어비로 느껴지고, 터보랙이 없는 만큼 변속기의 반응성이 예민하지 않더라도 불편감이 없다. 그런 정숙성과 부드러움에 더불어, 가장 놀랐던 점은 승차감 세팅이었다. 북미 현지전략형 모델인 만큼, 코너링보다는 크루징에 특화되어 있는 편안함이다. 소위 '물침대' 같은 승차감이라 표현하는 완연한 부드러움이다. 혼다의 어코드나 CR-V 등 승용 차량들은 경쟁 모델 대비 단단한 승차감이 특징이었는데, 혼다는 각 차종의 니즈에 맞는 차량 세팅에 충실한 듯 느껴진다.

그런 승차감 세팅 덕분에 노면 요철이나 방지턱을 처리하는 느낌은 굉장히 편안하다. 잔잔한 진동과 노면 소음도 대부분 여과되고, 리바운드가 심한 편도 아니다 보니 직선 주행에서는 최적의 부드러움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물론 섀시 세팅이 부드러워지면 그에 따른 차체 흔들림은 과장될 수밖에 없다. 파일럿도 급격한 코너에서는 과한 롤링이 느껴지는 편, 급제동 시 발생하는 노즈 다이브도 경쟁 모델에 비해서는 큰 편이다. 아울러 파일럿에 적용된 대용량 브레이크 시스템은 비교적 즉답적인 제동감이 장점이었는데, 그만큼 흔들림은 증폭될 수 있다.

그나마 차량 전폭이 넓고 차체 강성이 높다 보니 어느 정도 흔들림을 완화해 주는 감각이 있었다. 아무렴 일상적인 주행에서 불편감을 느껴지는 세팅은 아니고, 반대로 도심이나 장거리 주행 시 느껴지는 편안함은 독보적인 셈이다. 정말 편하게 운전하기 좋은 차량이었다. AWD 시스템은 네 바퀴에 안정적인 구동력을 배분해 주며, 묵직한 스티어링 휠 감각은 준대형 SUV 다운 주행 감성을 더한다. 일반적인 주행 모드도 제공되는데, 스포츠 모드에서는 더욱 무게감 있는 핸들링과 예민한 엔진 반응성으로 비교적 민첩한 피드백을 느껴볼 수 있다.

고속 주행에서도 V6 엔진의 정숙성은 돋보이는 강점이다. 차량 방음 처리 자체는 평이하다. 대신 '캐빈 토크' 시스템이 풍절음을 어느 정도 상쇄해 주긴 한다. 엔진 파워도 부족함은 없는 수준, 응답성이 예민하진 않더라도 탄력이 붙으면 꾸준하게 나아가는 감각이다. 혼다 센싱이라는 명칭의 ADAS 장비 역시도 전부 갖추고 있다. 사각지대 경보와 감응식 크루즈 컨트롤, 특히 국산 브랜드들처럼 차로 유지 보조 기능을 따로 활성화할 수 있다는 점이 편리했다. 항속주행 시에는 루프탑 텐트 적용에도 불구하고 14Km/L라는 훌륭한 연비를 보여주기도 했다.

앞서 가볍게 언급했지만 AWD 시스템은 험로 주파의 목적보다도 일상 주행에서의 안정성을 높여주는 역할이 더욱 비중이 크다. 보다 부드럽고 안정적이 코너링을 구현해 주고, 물론 빗길처럼 트랙션이 불안정한 노면에서 안정성을 더해줄 것이다. 또, 7가지 모드를 지원하는 지능형 지형관리 시스템 적용으로 어떠한 환경에서든 최적화된 주행을 돕는다는 혼다의 설명이다. 실제 시승 중 비포장도로나 물웅덩이도 빈번히 방문했는데, 순간적으로라도 그립을 잃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추가로 앞바퀴를 가까이 보여주는 서라운드 뷰 카메라가 편의성을 더해주었다.

장기간의 시승으로 혼다 파일럿과 한국의 다양한 장소를 방문했다. 두꺼운 가니시와 간결한 디자인으로 아웃도어 활동에 최적화된 파일럿의 디자인은 어느 환경에서든 듬직함을 남겨준다. 도심지에서도 혼다 브랜드 특유의 세련미가 돋보였다. 이는 블랙에디션 트림의 차별화를 통해 더욱 완성도 높은 외관 디자인이 구현된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디자인 자체가 단순한 만큼 첫인상부터 매료되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오래 볼수록 만족감이 더해지는 편이다. 특히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였던 후면 디자인은 SUV 고유의 터프함이 잘 나타난다.

직관적인 실내 구성은 혼다 파일럿의 부드러운 승차감과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했다. 정말 '편리함' 그 자체에 치중하는 사용감을 제공해 준다. 스크린의 터치스크린과 분리되어 있는 물리 버튼, 즉답적인 피드백을 주는 각종 버튼과 다이얼 들은 익숙해지는 대로 사용성이 정말 편했다. 공간에 대한 활용성은 당연한 부분, 단순한 용량이 아니라 개방적인 공간감 자체가 주는 만족감 자체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앰비언트 라이팅과 BOSE 프리미엄 사운드가 전하는 은은한 고급스러움이 생각보다 감성 품질을 큰 폭으로 높여주었다.

혼다 파일럿 블랙에디션을 장기간 시승했다. 대담하면서도 간결한 외관은 블랙 에디션의 차별화가 더해져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준다. 실내 공간은 편의성과 활용성이라는 패밀리 SUV의 중점을 담아낸 부분, 여타 모델들과 달리 부드럽고 여유로운 승차감도 장르의 니즈에 충실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점은 부드럽고도 조용한 엔진 필링, 혼다의 기술력과 기본기를 경험해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화려한 디자인이나 옵션이 탑재되어 있지 않더라도, 차량의 본질에 있어서는 가장 우수한 성능을 보여준다. 길게 볼수록 만족스러운 SUV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글/사진: 유현태

유현태

유현태

naxus777@encar.com

자동차 공학과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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