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특집 기획 특집 > '새나라'부터 시작된 한국의 배지 엔지니어링

'새나라'부터 시작된 한국의 배지 엔지니어링

르노 탈리스만과 르노삼성의 SM6는 서로 판박이다. 생김새가 99% 일치한다. 딱 하나 차이점은 엠블럼이다. 탈리스만은 르노의 ‘로장쥬’를 달았고 SM6는 르노삼성의 ‘태풍의 눈’ 달았다. 이처럼 엠블럼만 바꿔서 파는 것을 ‘배지 엔지니어링(Badge engineering)’이라 일컫는다.

배지 엔지니어링은 한 모델을 마크 바꿔 여러 브랜드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 개념을 처음 도입한 메이커는 GM이다. 1900년대 초반, GM은 한 가지 모델을 개발하되 쉐보레, 폰티악, 뷰익, 올즈모빌 등 여러 엠블럼을 붙여 팔았다. 개발비를 아끼면서도 판매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들의 전략은 먹혀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배지 엔지니어링은 전세계적으로 유행처럼 번졌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성장에도 배지 엔지니어링이 함께했다. 초창기는 초라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남긴 윌리스 MB의 부품을 떼어다 ‘ㅅㅣ-ㅂㅏㄹ’을 만든 게 전부였다. 제대로 된 완성차가 만들어진 건 1962년부터다. 자동차 공업 보호 육성법이 발표된 이후 여러 배지 엔지니어링 모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자동차들은 무엇이 있을까?

1) 첫 번째 배지 엔지니어링 자동차, 새나라
1962년, 박정희 정권 주도로 새나라자동차가 설립됐다. 새나라자동차는 첫 번째 모델로 닷선(닛산자동차의 전신) 블루버드를 들였다. 이름은 회사명을 딴 ‘새나라’였다. 새나라는 품질과 기술 면에서 ㅅㅣ-ㅂㅏㄹ을 압도했다.
하지만 역사는 짧았다. 1962년에 1,710대, 다음 해에는 1,063대를 팔았다. 나름 인기를 끌었지만 특혜와 정치 개입 논란 등으로 잡음이 일었다. 결국 새나라자동차는 1963년 5월 도산했다. 물론 첫 번째 배지 엔지니어링 자동차인 새나라도 함께 단종됐다.

2) 현대자동차의 첫 번째 양산차, 코티나
현대자동차는 1967년 11월 설립됐다. 이듬해 2월, 포드와 협약을 맺고 첫 번째 자동차를 만들었다. 포드의 유럽 전략 모델인 ‘코티나’를 리뱃징 한 모델이다. 코티나는 당시 라이벌인 코로나(신진자동차)보다 비쌌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큰 사이즈와 좋은 운동성으로 찾는 이가 많았다.
초기에는 품질이 나빠 ‘고치나’라는 별명도 붙었다. 하지만 2세대 코티나를 시작으로 코티나 마크5까지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 1983년 4월까지 판매됐으며 스텔라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3) 국산화율 끌어올린 기아자동차 브리사
기아자동차는 1973년에 이르러서야 승용차를 만들었다. 마쯔다 파밀리아를 리뱃징한 ‘브리사’가 주인공이다. 픽업 버전인 B-1000이 먼저 출시됐다. 세단형인 S-1000은 1974년에 나왔다. 엠블럼만 바꿔 단 자동차이지만 새나라, 코티나와 달리 부품 국산화율을 60%까지 높인 게 특징이다.
브리사는 연비가 좋아 택시로도 찾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1976년 현대자동차 포니가 출시되자 인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자동차 공업 통합 조치(1981년)로 인해 단종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배지 엔지니어링은 이어졌다. 고급 세단의 상징으로 통했던 현대 그랜저, 소형차 신화를 이끌었던 기아 프라이드, 대우가 만든 월드카 르망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메이커의 자동차를 리뱃징한 사례도 있다. 과거 현대 베르나는 멕시코에서 닷지 애티튜드로 팔렸다. 당시 멕시코는 수입차에 50%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했다. 하지만 현지에 공장을 갖춘 회사에 대해서는 관세를 면제해줬다. 지금과 달리 공장이 없었던 현대자동차는 배지 엔지니어링을 통해 멕시코에 수출길을 열었던 것. 이 외에도 기아 카니발에 현대 엠블럼을 단 앙투라지, SM7에 르노 로장쥬를 단 중국 시장용 탈리스만, G4 렉스턴의 인도 시장 버전인 마힌드라 렉스턴 등이 있다.

리뱃징 자동차들은 최근에도 쉽게 볼 수 있다. 맨 처음 언급한 르노삼성이 대표적이다. 초창기 SM5는 닛산 세피로를 기반으로 디자인 일부와 편의사양을 국내 환경에 맞게 변경한 모델이었다. 현재 판매 중인 SM6나 QM6도 마찬가지다. 다만 예전에는 타사의 모델을 들여와 일부 부품을 국산화하는데 주력했다면 최근에는 개발 단계부터 함께 참여하는 추세다.

한편 르노삼성자동차는 국내 생산 모델은 태풍의 눈 엠블럼을, 수입 모델에는 로장쥬를 달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근 수입 판매 중인 클리오와 마스터가 단적인 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마케팅 효과가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슷한 예로 GM 대우는 2011년부터 사명을 쉐보레로 바꿨다. 엠블럼도 쉐보레 ‘보타이’를 쓴다. 결국 르노삼성자동차도 삼성 떼고 르노자동차로 바뀔 수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