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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다르다는 점,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LWB P530 오토바이오 그래피 시승기

빅블러 현상이라는 표현이 있다. 산업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한 표현이다. 대표적인 예시는 금융업과 IT산업의 융합이었다. 대형 금융사는 적극적인 마케팅을 위해 IT산업을 품는다. IT서비스 플랫폼은 이용자 수 유치를 위해 금융업에 침투한다. 자동차 산업 또한 순수 기계와 전자 제어의 융합, 메카트로닉스 공학과 커넥티비티 산업의 결정체가 된지 오래다. 자동차 시장으로 이해할 때 '빅블러' 현상의 가장 큰 예시는 '크로스오버'라고 생각하다. 분리되어 있던 SUV 산업과 승용차 산업의 경계가 흐릿해진 것이다.

랜드로버는 '고급화 SUV'라는 개념을 제시했던 선대 브랜드다. SUV 전문 기업으로써 인지도와 기술력을 축적했고, 북미 시장에서 큰 호응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SUV와 승용차의 경계가 마치 '블러'처럼 흐릿해지며 승용차 전문 기업들이 시장에 진입한 것이다. 승용차 기업들에겐 신흥시장이자 블루오션, 고마진 시장이었으므로 공격적인 라인업 확장에 돌입한다. 결국 재무구조가 악화된 랜드로버는 워크아웃이 필요했고, 네트워크와 모회사 금융 지원을 통해 경영 정상화에 이른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랜드로버는 'SUV' 명가라는 정통성을 유지했다.

유동적인 기업일수록 가치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통을 고수할수록 시장 유치가 쉽지는 않다. 2021년 공개된 랜드로버의 차세대 레인지로버는 여전히 정통성이 남아있는 듯 익숙한 외모를 지녔다. 실제 레인지로버 특유의 여유로운 승차감 세팅과 험로 주파 능력을 답습했다. 함께 MLA-FLEX라는 고강성 경량 플랫폼을 도입했고, 소프트웨어 및 커넥티비티 기술을 강화하며 트렌드에 대응한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럭셔리 SUV 시장을 놓지 않은 랜드로버의 결정체였다. 특히 롱 휠베이스 모델은 세단을 대체해 쇼퍼 드리븐 용도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시승 차량은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LWB P530 Autobiography (5인승)이다. 레인지로버는 베이스 모델 SWB와 롱 휠베이스 모델 LWB 모델로 구분된다. 롱 휠베이스의 경우 5인승과 7인승을 택할 수 있는데, 쇼퍼 드리븐 용도로는 2열 풀 패키지 구성의 5인승 모델이 적합하다. 출고가도 5인승 모델이 더 고가에 해당한다. 엔진 트림의 경우 디젤 D350과 가솔린 P530으로 나뉜다. 트림 구성은 최고급 내장재 사용 및 옵션을 보강한 SV 트림이 있고, 오토바이오 그래피, HSE 트림을 선택할 수 있다. 2024년형 부터는 센터 콘솔 디자인에 버튼이 사라지고 더욱 간소화된 상태로 출고된다고 한다.

레인지로버는 유사한 형태의 디자인을 계승하며 헤리티지를 쌓아 올려 왔다. 그 형태는 점점 화려해져 왔지만, 5세대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며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다졌다. 사각형의 라디에이터 그릴과 헤드램프, 범퍼 등 형상 자체는 단조롭다. 하지만 선명한 LED 헤드램프 그래픽, 섬세한 라디에이터 그릴 패턴 등에서 정교함을 알아볼 수 있다. 거대한 엔진룸을 감싸는 '클램셀' 후드와 라디에이터 그릴, 그리고 헤드램프는 테두리를 검은색으로 마감하면서 단차가 눈에 띄지 않게 동화시킨다. 보닛의 '캐슬' 라인도 레인지로버의 헤리티지중 하나다.

측면 디자인 또한 헤리지에 근간을 둔 미니멀리즘이다. 크램셀 후드와 테일램프를 연결하는 스웨이지 라인은 굉장히 얇으면서도 선명해진다. 이 외 굵직한 캐릭터 라인은 배제되었으며 도어 핸들까지 오토플러시 타입이다. 가장 특별한 점은 그린하우스였다. 차체 기둥인 필러와 유리창의 높낮이 차이가 사라진 형태를 보인다. 플러시 글레이징 기법이라 한다. 그리고 글래스와 바디패널이 자연스럽게 합쳐지는 '히든 웨이스트 피니셔'도 완성도가 훌륭했다. 디자이너의 의도를 그대로 실현하기 위한 공학적 접근이 느껴진다.

결국 뒷모습까지 간결한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테일램프와 턴시그널 램프가 검은색 가니시처럼 디자인되었다는 점이 참신하다. 이전 세대에 비해 조명의 크기가 훨씬 얇아지기도 했다. 덕분에 리어펜더의 볼륨이 더욱 부풀려져 보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차체 전방에서 후방으로 갈수록 면적이 좁아지는 듯한 '보트 테일' 디자인을 취하고 있다. 역동적이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자아낸다. 이탈각을 고려한 듯 가파르게 상승하는 리어 오버행은 오프로드에서의 성능을 내재한다. 고급스러운 소재 선정은 영락없는 럭셔리 SUV가 맞다.

역시 간결함을 추구하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다. 고급스러운 소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수평형의 스티어링 휠과 13.1인치 터치스크린, 세미 플로팅 타입 디지털 클러스터는 멋과 기능 모두를 챙기고 있다. 특히 LG전자와 협력한 센터스크린 피비프로는 직관적인 테마와 빠른 응답성, 그리고 레인지로버의 수많은 기능을 제어하는 확장성을 지닌다. 공조장치 다이얼은 마치 버튼처럼 누르며, 열선 및 통풍 시트 제어기로 전환된다. 역시 디자인과 직관성 모두를 챙겼다. 기어노브는 플로어 시프트 타입, 모든 수납공간은 고급스러운 소재로 마감된다.

롱 휠베이스 모델답게 2열 공간은 쇼퍼 드리븐 그 자체다. 시트는 상당한 두께를 자랑하며, 높은 히프 포지션과 자유로운 리클라이닝 각도가 특징이다. 넓은 공간에 높게 자리 잡은 시야는 면적이 넓은 창문과 광활한 파노라마 선루프로 개방감을 갖춘다. 듀얼 모니터, 전동식 선 블라인드, 메리디안 3D 오디오 시스템 등 호화 옵션은 기본이고, 디스플레이가 포함된 센터콘솔은 전동식으로 펼쳐진다. 트렁크조차 호화롭다. 위아래로 분리되는 클램셀 게이트 또한 레인지로버의 헤리티지중 하나다. 여러모로 활용성이 뛰어나 보인다.

승하차 시에는 오토 플러시 도어핸들 말고도 전동식 사이드 스텝이 운전자를 반긴다. 마치 소파 같은 시트는 기본적으로 포지션이 높다. 레인지로버 P530의 경우 엔진 시동을 걸면 굉장히 우렁찬 배기음이 유입된다. 물론 배기음은 일시적이다. V8 엔진의 잠재력을 표현하며, 웅장한 레인지로버의 존재감을 한단계 더 상승시킨다. 레인지로버가 V8 엔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여유와 부드러움이다. 귀를 기울여 들려오는 엔진의 소음은 굉장히 매끄럽다. 진동과 소음의 진폭이 굉장히 낮고 균일했다고 표현하고 싶다.

트윈터보를 채택하고 있지만 터보래그로 인한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출력을 매끄럽게 전개한다. 구체적으로 V8 트윈터보 엔진의 최대출력은 530마력, 토크는 76.5Kg.m이다. 제조사는 BMW다. 변속기 역시 독일 ZF 사의 8단 토크컨버터를 맞물린다. V8 유닛은 M 디비전에 탑재하겠지만, 랜드로버는 고급스러운 주행감을 위한 장비이다. 선형적인 출력 전개를 보여준다. 물론 급가속에는 수치에 응당하는 강한 토크가 느껴진다. 공차중량이 2.7톤을 상회하다 보니 반응이 즉답적이진 않다. 정확히는 체감 가속이 느리다고 표현해야 겠다.

공식 제로백이 4.8초다. 절대적으로 강력한 파워다. 계기판으로 보이는 숫자로 빠르게 치솟지만, 재미를 주는 가속감이 아니었다. 다이내믹 모드에서도, 차량을 재미 삼아 다루기에는 물리량이 너무 크다. 반대로 급가속 시에도 전달받을 수 있는 평온함이 강점이다. 랜드로버가 자랑하는 터레인 리스폰스 2는 온 로드에서도 끈끈한 그립력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어댑티브 다이내믹스가 포함된 전자제어식 에어 서스펜션은 레인지로버의 상징 요소 중 한 가지다. 이른바 요트 같은 승차감을 구현하기 위한 필수 장비가 된다.

많은 소비자들을 매료시킨 레인지로버의 승차감은 사실 예측 가능한 수준이다. 최상의 부드러움을 기대했고 그에 부응한다. 본성적으로는 세팅의 차이라고 본다. 역시 펀 드라이빙보다는 크루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거운 차체는 타이어를 억누르지만 하체는 충격을 부드럽게 흡수한다. 코너링이나 급가속에서도 차체는 수평 상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오프로더를 지향하는 만큼 휠 트래블 거리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에어 서스펜션의 차고 조절 기능은 공기저항을 줄이고 롤 센터를 낮추기 위한 목적도 분명했다.

그래서 실제 도심 주행에서 시야는 생각보다 낮았다. 물론 생각보다 낮았다는 의미일 뿐 웬만한 소형차들은 천장이 보이는 포지셔닝이다. 그런 위치에서 마치 떠다니는 듯 평온한 승차감을 제공한다. 오래전 승용차처럼 둥실둥실한 느낌도 아니다. 미묘한 차이지만 주행성이 물렁하여 불안하다는 감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휠베이스가 긴 만큼 코너링에 대한 약간의 이질감은 있다. 적응만이 필요했다. 최대 7.3도로 꺾이는 후륜 조향 기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회전반경은 예상보다 짧다. 최대 조향각에서는 오버스티어에 편향된 거동을 보인다.

한편 브랜드의 설명에 따르면 배수 기능을 탑재한 범퍼는 최대 90CM 깊이까지 도강 능력을 보장하고, 터레인 리스폰스 2는 주행 환경에 따른 최적의 구동력을 배분한다. 2단 트랜스퍼 박스는 기본이다. 당연히 센터 디퍼렌셜을 잠글 수도 있다. 오랜 명성을 쌓아 올린 만큼 험로 주파능력에 의구심이 들지 않았다.그래도 레인지로버의 수요층은 대부분 도심 주행을 우선시할 것이다. 승차감부터 패키징까지 온 로드 스타일 크로스오버였다.

그런 관점에서 레인지로버가 지원하는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참 만족스러웠다. 정보 전달에 충실한 클러스터, 피비프로는 원하는 기능들을 직관적으로 조작할 수 있으며, 어라운드 뷰 시스템도 해상도와 정확도가 높아 실용성이 뛰어났다. 반자율 주행 장비는 레벨2, 일반적인 성능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레인지로버 LWB 모델의 공인연비는 6.8Km/L 다. 연비는 감안해야 하는 점, V8 엔진과 토크컨버터의 조화는 레인지로버의 완성도에 '티끌'을 남기지 않았다. 그 성능에 감탄하기 보다 승차감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부드러움이 강점이었다.

레인지로버 LWB를 시승했다. 시종일관 평온한 승차감과 주변을 압도하는 존재감이 인상적이다. 21세기 이후 승용차와 SUV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 경계가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수십 년간 정체성을 갈고닦아온 랜드로버의 레인지로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긴 댐핑 스트로크를 기반으로 한 평온한 승차감, 높은 시야와 개방감, 드넓은 공간, 자유로운 기동성은 승용차 사업부 출신의 고급 크로스오버와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이성적인 비교, 감성적인 접근 모두를 만족시킬 것이다.

글/사진: 유현태

유현태

유현태

naxus777@encar.com

자동차 공학과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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