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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볼보 1000대’를 외상으로 가져간 사연

1970년대 북한은 스웨덴에서 볼보 1000대를 외상으로 주문하고 지금까지 한 푼도 갚지 않았다. 50년째 청구서를 보내는 스웨덴 정부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미수금 사건의 전말을 살펴본다.

북한이 볼보를 주문했던 시절, ‘마지막 황금기’

1970년대 초, 북한은 지금과 달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평양은 서울보다 1년 먼저 지하철을 개통했고, 컬러 TV도 6년 빨리 도입했습니다. 남북적십자회담에 참석한 한국 대표단은 “평양이 서울보다 더 발전한 것 같다.” 라는 소감을 남겼을 정도로, 북한의 경제는 건재했습니다.

이때 북한은 외국의 기술과 자본을 들여오려는 외자 도입 정책을 추진합니다.
“조금 살만하니, 이제는 세계무대에 나서보자”는 판단이었죠.

서방의 ‘데탕트 시기’와 북한의 외상 거래

당시는 냉전이 완화된 데탕트(Detente) 시기로, 미국과 소련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스웨덴·핀란드·오스트리아 같은 중립국들은 북한을 신흥시장으로 바라봤습니다. “이념은 달라도, 교역은 가능하다.” 그 결과 북한은 스웨덴: 볼보(Volvo) 144 모델 1000대, 핀란드, 오스트리아: 조선·광산·제철 설비 등을 수입했습니다. 문제는 ‘모두 외상’이었다는 점

오일쇼크 이후, 북한의 디폴트 선언

하지만 곧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찾아왔습니다. 석유 가격이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로 4배 이상 폭등하면서 전 세계 제조업이 위축됐고, 원자재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석유를 수입하고 광물을 수출하던 북한은 외화가 바닥나며 대금 상환 능력을 잃게 됩니다.

결국 1976년, 북한은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했습니다. 김일성은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우리는 외채를 지지 않는다. 남의 돈에 의존하는 경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라고 밝히며 서방과의 교류를 단절했습니다.

당시 볼보 144의 수출 가격은 한 대당 약 5,000달러. 1000대면 약 500만 달러, 현재 가치로 약 440억 원에 해당합니다. 볼보가 아닌 스웨덴 정부가 피해를 입은 이유는 EKN이 거래 보증을 섰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대금을 지불하지 않자, 결국 스웨덴 정부가 대신 손해를 떠안은 셈이죠.

핀란드와 오스트리아는 이미 북한 채권을 회수 불가로 회계상 손실처리했습니다. 하지만 스웨덴은 지금까지도 매년 청구서를 보내고 있습니다. 비록 이 돈을 받을 가능성은 0에 가깝지만, 기록상 채권을 유지하며 “원칙은 지킨다”는 자세를 이어가고 있죠.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관은 SNS를 통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볼보 144는 여전히 평양의 도로를 달리고 있다. 내구성만큼은 진짜 최고다.”

현재까지도 평양 거리에서 운행되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으며, 볼보 특유의 내구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조르디

조르디

joso@enca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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